누벨바그(Nouvelle Vague)
195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1962년 절정에 이른 프랑스의 영화 운동. 누벨바그는 ‘새로운 물결(New Wave)’이란 뜻이다. 이 운동의 원동력은 소그룹 영화 마니아들로부터 나왔는데, 그들은 대부분 프랑스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에 글을 기고하며 경력을 시작했으며, 특히 잡지 발행인이었던 비평가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의 영화 비평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프랑수아 트뤼포(François Truffaut),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에릭 로메르(Eric Rohmer), 자크 리베트(Jacques Rivette) 등은 기존의 안이한 영화 관습에 대항하는 글을 썼고, 좀 더 개인적인 방식의 영화 제작, 즉 감독의 개인적인 영감과 비전을 투여하는 방식과 스타일을 논설했다. 최초의 누벨바그 영화는 샤브롤의 〈미남 세르주〉(Le Beau Serge, 1958)이다. 그의 두 번째 영화 〈사촌들〉(Les Cousins, 1959)은 아이러니가 넘치는 보헤미안 기질의 파리 학생들 이야기를 옆에서 지켜보는 듯한 친밀감과 객관적인 카메라 거리를 조화시키면서 기존 형식을 무시하는 태도로 대담한 내용을 찍는 미덕을 보여 줬다.
누벨바그는 자전적 영화로서 한 소외된 소년의 초상을 그린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Les Quatre Cents Coups, 1959), 2차 세계대전의 기억에 침식되는 한 일본인 남자와 프랑스 여인 간의 사랑을 그린 알랭 레네(Alain Resnais)의 〈히로시마 내사랑〉(Hiroshima Mon Amour, 1959), 당돌하며 희극적인 방식으로 미국 갱 영화에 경의를 표한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A Bout de Souffle, 1960)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 영화에서 고다르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관습을 조롱하는 듯한 태도로 제멋대로 진행되는 줄거리와 등장인물의 행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서 비약과 생략적인 편집 태도를 취했다.
장 뤽 고다르는 <네 멋대로 해라>(1960)에서 장편영화의 구성법을 벗어난 단편적 이야기 구조를 도입했다. 또한 카메라를 어깨에 들고 찍는 핸드헬드(hand-held, 들고 찍기) 카메라 기법과, 각 장면이 뚝뚝 끊겨지는 편집기법인 점프 컷(jump-cut)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후 이런 방식은 누벨바그의 대표적 형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기존의 영화에서 금지되거나 꺼려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누벨바그의 영화들은 1959년에서 1962년까지 몇 년간 지속되었을 뿐이지만 그 영향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누벨바그 작가들은 저마다 각각의 접근 방식과 감수성을 갖고 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내보인다.
[1] 인물은 당돌하고 비전통적이며 대체로 감상을 배제하여 다룬다.
[2] 구성은 느슨하고 사실적이며 혁신적이다.
[3] 경량 장비의 사용. 소형 촬영기와 장비를 사용하여 우연적이고 사실적인 영상과 음향을 얻어낸다.
[4] 현지 촬영과 야외 촬영의 선호.
[5] 생략 편집을 활용하여 이미지들의 연관, 이미지와 음향, 그리고 매체 자체에 대한 주의를 상기시킨다.
[6] 영화적 공간과 시간에 관한 실험.
[7] 초창기 영화들에 대한 암시를 통해 전통의 지속과 단절을 짚어내고 특정 작품이 품고 있는 영화적 자의식에 관해 언급하며 특정 감독이나 영화에 경의를 표한다.
[8] 인간과 우주의 부조리함에 대한 실존주의적 감각을 갖고 있다.
누벨바그 영화 중 역대 비평가들로부터 높이 평가받는 작품으로는 트뤼포의 〈피아니스트를 쏴라〉(Tirez sur le Pianiste, 1960)와 〈쥘과 짐〉(Jules et Jim, 1962),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Vivre Sa Vie, 1962), 레네의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L’Année Dernière à Marienbad, 1961) 등이다. 누벨바그는 세계 여러 나라의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의 영향으로 미국과 유럽 영화는 전통과 관습에서 벗어나 작가주의 영화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 (영화사전, 2004.9.30, propaganda)
왕가위, 홍삼수 감독의 작품속에서 누벨바그의 영향을 발견한다.
Le Beau Serge, (1958)
Les Quatre Cents Coups, (1959)
A Bout de Souffle, (1960)
Tirez sur le Pianiste, 1960
Jules et Jim, 1962
이탈리아의 경우, 무솔리니 정권 아래에서의 영화들은 대하 사극이나 상류 계급들의 애정 행각을 소재로 한 멜로영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면서 전쟁의 폐허와 비극을 영화로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생겨났는데 비평가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새로운 사실주의를 뜻하는 네오리얼리즘 영화라고 불렀다.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대표작 중 하나인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도시> Rome Open city (1945)는 전쟁에서 남겨진 잡동사니 재료들로 만들어졌으며, 포화 속에 무너진 영화 스튜디오를 대신해 모든 장면들이 폐허 속 실제 장소에서 촬영되었다.
Rome Open city (1945)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특징은 바로 극영화와 기록영화의 혼합이라는 점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들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 극영화 전통에 속해있다고 볼 수 있지만, 전통적인 극영화에 비해서는 연기와 대사의 비중이 적고, 비전문배우를 주로 기용하며, 야외촬영을 선호하였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볼 때에는 기록영화의 특성 또한 아우르고 있다. 이들의 목표가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보편적인 것을 이끌어내는 것이었기에, 그러한 형식적인 시도는 충분히 성공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1962년 2월 28일 제8차 서독 단편영화제에 26명의 젊은 독일 감독들이 모여서 “낡은 영화는 죽었으며 우리는 새 것을 믿는다.(Der alle Film ist tot. Wir glauben an den neuen.)”라는 내용의 오버하우젠(Oberhausen) 선언을 발표했다. 이들 뉴 저먼 시네마 감독들은 과거의 영화 전통을 거부했고 독일 사회에 존재해 왔던 기존의 이야기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이들은 새로운 형식적 실험을 행하기도 했는데, 특히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는 극작가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소외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는 영화라는 매체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아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려고 하는 시도였다. 파스빈더는 이와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현란한 화면구성과 색채, 뒤엉킨 플롯, 그리고 불안정하게 움직이는 카메라 기법 등을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