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탤지아 [Nostalghia] : 향수어린 음악 아코디언 그리고 ...

아코디언

손풍금이라고도 하였는데 가난한 사람을 위한 피아노로 불리기도 했다. 아코디언은 반음계도 자유로이 연주할 수 있는 악기로 오른쪽에 3옥타브 반에 이르는 피아노식 건반이 있고, 왼쪽에는 베이스라는 저음열()과 코드버튼이 나열되어 있다. 코드버튼은 1개로 장3화음·단3화음·속()7-감()7 등 각조(調)의 모든 화음을 낼 수 있어 고도의 연주도 가능하다. 리드도 한 줄뿐만 아니라 음색을 달리하는 3∼4열을 갖추고 음색을 변화시키는 음전()으로 조절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경음악계의 인기 있는 악기이며 학교나 직장에서도 널리 애용되고 있다. 또한 아코디언에는 피아노아코디언 외에 전부 버튼식 건반으로 된 것도 있다.
이 악기는 1822년에 베를린의 F.부슈만이 발명한 것이라고 하며, 당시에는 한트에올리네(Handäoline)라고 하였다. 그후 1829년 빈의 C.데미안이 다소 개량하여 아코르디온(Akkordion)이라는 이름으로 팔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전음계가 버튼식으로 된 것으로 하모니카와 같이 밀 때와 당길 때 소리가 달라지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왼손 쪽에 으뜸화음과 딸림화음 등의 버튼이 달려 있었다. 이런 종류의 소형은 장난감으로 보급되었으며 그것은 전음계식이었기 때문에 디아토닉 아코디언이라 했고, 오늘날과 같은 반음계식은 크로마틱 아코디언이라고 부른다. 이런 종류의 악기로는 중남미의 주요악기인 밴드네온이 있다.
출처 : 네이버지식백과 -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21803&cid=40942&categoryId=33037



아코디언 음악은 세계의 여러 음악적 장르와 함께 한다.  
라틴아메리카쪽, 프랑스 유럽쪽을 비롯해 집시음악과 클레즈머(유태계 집시음악), 재즈, 탱고, 이탈리안 음악, 쿠반음악에서도 아코디언(지역에 따라 반도네온)은 함께한다. 
이런 음악은 그 지역의 향수를  드러나기 때문에  어떤 영화속의  장소와 지역적 향수를  표현할때  잘 어울린다.   
지난 글에서  클레즈머 스타일의 음악을 소개하며 그와 관련된 것은 소개한바 있다. 
탱고는  한국사람에게 많이 알려지고 유명한 피아졸라가 대표적이라 구지 소개하지 않겠다. 

이 글에선 한국의 아코디언 대가 심상락의 인터뷰를 통해 그를 소개하고 프랑스의 색채를 잘 드러내는 아코디언과 함께하는  프랑음악과  프랑스 아코디언의 전설 리샤드 길리아노의 음악을 소개한다. 

주간조선에 실린  한국의 아코디언 대가  심상락씨의 인터뷰이다
https://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158100008
* 중간중간 원기사에 없는 필요한 영상은 추가하였습니다. 

가수 최백호가 동분서주하고 있다. 자신이 대표를 맡고 있는 한국음악발전소가 주최하는 헌정 공연 준비 때문이다. 서울 잠실 올림픽공원 내에 있는 올림픽홀에서 6월 26일 오후 5시에 열리는 헌정 공연의 제목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영국, 미국,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에서는 음악사에 공헌이 지대한 원로 음악가에 대한 헌정 공연이 가끔 있지만 우리나라는 이례적이다. 이번 헌정 공연에 출연하는 후배 가수들은 장사익, 최백호, 주현미, JK 김동욱, 적우 등이다. 물론 헌정 공연에 출연하는 가수들은 차비 외에는 출연료가 없다. 헌정 대상이 누구기에 몸값 비싼 가수들이 천금 같은 스케줄을 빼서 출연하기로 했을까.

   헌정 공연의 대상은 아코디언 연주가 심성락(75)이다. 녹음 연주자(세션맨)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 아코디언 연주자인 그는 오랜 세월 가수와 작곡가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직업 음악가 외에도 영화 매니아층에서도 심성락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영 화 ‘봄날은 간다’ ‘인어공주’ ‘효자동 이발사’ ‘달콤한 인생’에서 그의 아코디언 연주가 잔잔한 배경 음악으로 깔렸다. 특히 영화 ‘봄날은 간다’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상우(유지태 분)와 은수(이영애 분)의 이별 장면에서 노을처럼 깔리던 아코디언 멜로디를 잊지 못한다.

   
   2009년 생애 첫 음반

   2009년 심성락은 생애 첫 앨범을 냈다. 제목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평생을 다른 가수들의 노래에 들어가는 음악을 연주하며 살아온 그였다. 앨범 제목이 궁금해진다. 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고 했을까. 아코디언의 주름진 공기주머니를 벨로스라고 부른다. 아코디언 연주는 벨로스에 바람을 담아야만 소리가 난다. 그러니 아코디언의 멜로디는 바람이 만드는 노래가 되는 것이다.



   지 난 5월 24일 서울 광진구 건국대 입구 부근의 한 카페에서 심성락씨를 만났다. 깡마른 체격. 그러나 예술가의 포스가 느껴졌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비상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평생 동안 하루 다섯 갑을 피우던 담배를 지난해부터 두 갑으로 줄였다고 한다. 기자는 그 많은 흡연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놀라운 기억력을 가진 이유가 57년간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손가락을 움직였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추측해봤다. 세 시간 동안 파란만장한 음악 인생을 들었다.

   심성락은 부산에 있는 경남고 2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다.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음악을 배운 게 음악 교육의 전부였다. 개인 교습을 받은 일은 물론 없다. 그런 그가 한국 최고의 아코디언 연주자라는 명성을 갖고 있다. 오로지 독학으로 아코디언을 익혔기에 그를 가리켜 ‘아코디언의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심성락은 1936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일본에서 다녔다. 선친은 심상염. 광복 뒤 귀국해 대구에서 살았다. 본명은 심임섭. 직업 아코디언 연주자로 본격 나서면서 심성락이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어릴 적 심성락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형 심근섭이다.

   “형님이 영어를 무지하게 잘했습니다. 미군을 자주 접촉하면서 통역을 맡았어요. 당시 형님은 대구에서 아주 유명했는데, 집에 SP판이 엄청나게 많았어요. LP판 나오기 전에 있었던 판이죠. 집에서 SP판으로 팝송, 재즈를 수없이 들었습니다.”

   그는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부산에서 다녔다. 경남중을 거쳐 경남고에 다닐 때였다. 경남중고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야구명문교. 그에게는 경남고 야구부의 투수이면서 노래를 잘 부르는 친구가 있었다. 성락은 친구를 따라 부산 광복동의 레코드가게에 자주 놀러갔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일 겁니다. 전쟁이 끝나던 해였죠. 친구를 따라 레코드가게에 자주 갔어요. 레코드가게 앞에는 언제나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죠. 레코드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최신 유행곡을 듣기 위해서였어요. 모두들 가사를 받아적느라 정신이 없었죠. 자주 가다 보니 레코드가게 점원이 저랑 동갑이란 걸 알았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친해졌죠. 학교 끝나면 으레 레코드가게에 가서 살았습니다.”

   
   작곡가 이재호와 인연

   성 락은 학생이면서 ‘준점원’이 되었다. 가게가 비면 가게도 지켰고, 주인에게 밥도 얻어 먹었다. 어느날이었다. 서울에서 피란 내려온 악기상 주인이 레코드가게의 절반을 세내 악기점을 열었다. 이게 성락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성락은 레코드가게와 악기점 양쪽을 다 봐줄 때도 있었다. 한가할 때마다 틈틈이 악기를 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타를 쳐보다가 자연스럽게 아코디언으로 옮겨갔다.

   “누 구나 교실의 풍금을 쳐본 일이 있잖아요. 그래선지 아코디언의 건반이 손에 익었어요. 어린 시절 집에서 SP판으로 음악을 듣고, 또 레코드가게에 살면서 음악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어지간한 멜로디는 다 외우고 있었거든요. 틈날 때마다 아코디언을 만졌습니다. 어느날 악기상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아코디언을 연주했죠. 그런데 악기상 주인이 가게로 돌아오다가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연주를 들은 겁니다. 주인은 누가 아코디언을 사러온 줄 알았답니다. 알고 보니 점원이었던 거죠. 주인은 얼굴이 빨개진 나를 보고는 ‘심군, 니 아코디언 잘하네’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날 이후 가급적 악기에 손을 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성 락은 이즈음 가수가 되려는 친구를 따라 유명 작곡가 이재호의 집을 드나들었다. ‘나그네 설움’의 작곡가 이재호는 당시 가수 지망생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성락은 부산 보수동 자택을 드나들며 심부름도 하고 가방도 들고 다녔다. 그는 ‘작곡가 이재호’의 가방을 들고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우쭐했다. 이재호의 ‘가방 모찌’를 하면서 성락은 자연스럽게 음악하는 사람들과 알게 되었다.

   6·25 전쟁 당시 부산은 임시 수도, 즉 대한민국의 중심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도 여전히 모든 게 부산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부산KBS는 제1회 전속가수를 모집했다. 심사위원은 황문평, 한복남, 이재호, 악기점 사장이었다. 매주 한 번씩 공개홀에서 예심이 없이 가수 지망생들을 대상으로 공개 오디션을 했다. 성락은 작곡가 이재호의 ‘가방 모찌’ 자격으로 공개 오디션 현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밴드 중에 아코디언 연주자가 있었는데, 팝송만 알고 유행가를 잘 몰랐어요. 3회가 진행될 때까지 반주가 노래를 못 따라갔습니다. 3회가 끝났을 때 아코디언 연주자가 다음부터 안 하겠다고 했어요. 그때 악기점 사장이 나보고 ‘심군, 다음부터는 네가 해라’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재호 작곡가가 놀라서 ‘야, 아코디언 할 줄 아나?’라고 물었죠. 내가 조금밖에 못한다고 하자 악기점 사장이 나서서 ‘아주 잘합니다’라고 말했어요. 그 말을 듣고는 이재호 선생님이 ‘그럼, 네가 해라’라고 했죠.”

   
   꿈속에서도 연주하다

   하루아침에 경남고 2학년생 심성락은 KBS밴드의 아코디언 연주자가 되었다. 성락은 더럭 걱정이 앞섰다. 아코디언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락이 악기점 사장에게 물었다.

   “악기는 어떻게 합니까?”

   “악기는 마음대로 써라.”

   “엑셀사 아코디언을 써도 됩니까?”

   성 락은 악기점에서 제일 작은 아코디언만을 짬짬이 만져보았다. 당시 최고급품이었던 이탈리아제는 쳐다보기만 할 뿐 감히 연주해볼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 성락은 방송 출연의 기쁨보다는 악기를 마음놓고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날아갈 듯했다.

   “그날부터 머릿속에 있는 유행가 레퍼토리를 혼자서 연습했죠. 잘 때도 갈비뼈에 건반을 상상으로 그려놓고 무수히 연주를 했습니다. 세상에 그처럼 즐거운 일이 없었습니다. 정말 무서운 집중력으로 연습을 했어요.”

   성락은 부산KBS 전속가수 모집 4회 공개 오디션에서 아코디언 연주를 맡았다. 오디션이 끝나자 작곡가 이재호는 “너, 아코디언 잘하는구나”라고 칭찬했다. 이렇게 되어 전속 악사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 의 나이 열여덟 살. 그는 경남고를 중퇴했다. 전쟁에 나가 연락이 끊긴 형님을 대신해 어머니를 모시며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위치가 되었다. KBS악단의 전속 아코디언 연주자로 자리잡자 여기저기서 연주 요청이 들어왔다. 토성동에 있던 백조카바레 악단에 들어가, 얼마 후 밴드마스터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성락에게 징집 영장이 떨어졌다. 논산훈련소에 갔지만 몸이 약해 군 면제를 받았다. 논산훈련소에서 그는 또 한번 뜻밖의 제의를 받게 된다. 직업란에 쓴 ‘아코디언 악사’라는 사실을 군예대에서 눈여겨보았다. 어느날 군예대 대장 정성일 소령이 그를 찾아와 군예대에서 연주해달라고 제의했다. 성락은 “논산 군예대에서 일하게 되면 혼자 계신 어머니를 모실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 정성일 소령은 얼마 뒤 돈 뭉치를 가져와 “이 정도면 어머니가 사시는 데 충분하지 않겠느냐”며 또다시 그를 설득했다. 결국 성락은 논산 군예대 악단으로 들어갔고, 3개월 뒤 악장을 맡았다. 논산 군예대에서 2년7개월을 활동했다.

   
   작곡가 데뷔… 이미자 노래 3곡 작곡
   

  군예대 악장 생활을 마치고 성락은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성락에게 일자리는 많았다. 카바레에서 밴드 생활을 하던 어느날 수금하러 왔던 지구레코드사 임정수 사장이 성락을 보고 작곡을 권했다. 성락은 반야월 작사의 ‘등대불’ ‘하소연’을 비롯해 10여곡을 만들어 1963년 서울로 상경했다.

   성락은 아세아레코드사와 연결되었다. 여기에서 신인 작곡가로서는 드물게 최고 인기가수 이미자가 그의 곡을 세 곡이나 취입했다. LP판이 막 나오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 는 아코디언 연주자였다. 작곡을 하기도 했지만 작곡만으로는 생계를 꾸릴 수가 없었다. 생업을 위해 서울 을지로 6가에 있는 천지나이트클럽에서 피아노 연주를 해야 했다. 피아노 연주 역시 독학으로 배웠다. 신성락씨는 “당시 나이트클럽의 레퍼토리가 거의 재즈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어려운 재즈곡을 어떻게 연주했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며 웃었다.

   기자는 심성락씨를 만나러 가기 전, 영화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그의 연주를 여러 번 들어보았다. 인생의 쓸쓸함, 사랑의 애절함, 그리고 짙은 노스탤지어(지난 시절의 그리움)가 느껴졌다. 이런 감정을 아코디언처럼 노래할 수 있는 악기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아코디언의 매력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아코디언은 멜로디를 주로 하는 악기예요. 감정을 건반으로 노래하듯 연주할 수 있는 게 매력이지요.”

   - 아코디언으로 연주하기에 좋은 곡 레퍼토리는 어떤 게 있나요.

   “김수희가 부른 ‘잃어버린 정’의 전주가 있고. 샹송 중에서는 ‘장미빛 인생’ ‘사랑의 찬가’ 같은 곡을 들 수 있어요. 발라드 중에는 ‘미스터 론리’가 생각납니다.”

   그가 열여덟 나이로 아코디언계에 등장하기 전 허경구, 황병렬, 노명석 같은 연주자가 있었다. 얼마 뒤 그는 한국 아코디언 연주의 최고봉으로 우뚝 섰다.

   - 연주자로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요. 연주자로서 나만큼 개런티를 많이 받은 사람이 아직 나오지 않았어요. 나는 ‘가요무대’ 같은 프로그램에 나가 전주만 연주하고도 50만원 이상을 받았어요.”

   - 최고의 대우를 해준 사람을 한 사람만 든다면 누가 있습니까.

   “제작자가 비용을 깎으려 할 때마다 작곡가와 가수들은 ‘심 선생님 아니면 안 됩니다’라고 주장해서 항상 연주료가 비싼 내가 초대받았던 겁니다. 그러니 한 사람을 특정할 순 없고 모든 작곡가와 가수들이 나를 인정해주었지요.”

   - 프랑스의 아코디언 연주자 리샤드 갈리아노와 공연을 같이 했는데요.

   “와, 갈리아노는 사람이 아니데요. 하늘에서 신이 내려와서 연주하는 것 같았어요. 프랑스 최고의 연주가라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세계 최고의 아코디언 연주자였습니다. 내가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리샤드 갈리아노


   그는 박정희 대통령부터 노태우 대통령 시절까지 역대 대통령의 행사에 초대되는 단골 악사로도 유명하다.

   - 연주자로서 많은 대통령을 만났는데, 음악에 가장 조예가 깊은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당연히 박정희 대통령이지요. 한번은 김종필 국무총리 생일날 총리공관에 갔는데 ‘짝사랑’을 부르러 나오시면서 ‘F마이너로 하면 될 거요’라고 하시데요. 젊은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어서일 겁니다.”

   
   “최고 대접 안 해주면 연주 안 한다”

   - 최근 들어 연주를 중단했다는 얘기도 들리던데요.

   “ ‘개런티를 조금만 낮추면 일이 많을 텐데’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는 일년에 한 번 하더라도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으면 안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 나이에 일거리 들어오기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 내가 음악가지만 이거 용감한 거요. 하지만 나를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해줘야지. 허허.”

   2009년 심씨는 제주에서 열린 그랜드민트 페스티벌에 초대되었다. 모던 록이 중심인 페스티벌에 그가 초청되었다. 민트페이퍼가 주최하는 이 페스티벌은 2007년부터 시작되었다. 2010년 그랜드민트페스티벌 시상식에서 올해 ‘최고의 공연’ 부문과 ‘최고의 순간’ 부문 수상자가 되었다.

   가수 최백호는 심성락씨에 대해 “내가 가수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함께 레코딩을 해온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심 성락 선생님은 독특한 반음계를 계발해낸 아주 뛰어난 연주자입니다. 일본인들도 그의 연주에 놀랍니다. 독학으로 아코디언을 배웠기 때문에 독특한 자기만의 연주 세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쉬운 것은 심 선생님 이후에 아코디언 연주자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워낙 아코디언 연주만으로 생활이 안 되기 때문이란 걸 알지만 안타깝죠.”

   최백호씨는 헌정 공연과 관련,“공연 수익금의 50%를 심성락 선생님에게 드릴 생각”이라고 했다.

   그 는 두 번 결혼했고 두 번 이혼했다. 슬하에 3남3녀를 두었다. 자녀 중에 아버지를 따라 아코디언을 하는 사람이 없다. 둘째 아들이 음악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제자들도 키우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의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했던 것처럼 미쳐서 배울 수 있겠나?”




- 심상락씨가 소개한 아코디언과 어울리는 곡으로 프랑스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장미빛 인생"  및 관련 동영상
장미빛 인생 아코디언 연주